잠깐만요, 머그잔을 놓고 왔어요! 안장에서 얼른 가져올게요.
자, 다시 불 앞으로 왔네요. 그럼 무슨 얘기부터 하죠?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고요, 베스미어 삼촌. 그러니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헷갈리는 게 당연하죠... 아! 그래요! 이 훈련이나 이론 수업에서 들은 건 아니긴 한데...
얼룩무늬 고양이와 붉은 여우 이야기 기억나세요? 사냥꾼이 털을 뜯어내서 토시를 만들려고 했다는 이야기 있잖아요. 당연히 기억하시겠죠. 케어 모헨에 있는 아이들 침대맡에서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셨나요? 수십 번? 수백 번? 게롤트한테도 하셨죠? 게롤트의 어린 시절은 상상도 못 하겠네요. 게롤트한테도 어린 시절이란 게 있긴 했나요?
아, 알죠. 당연히 어린 시절이 있었겠죠.
어쨌든, 이건 제가 꼬마일 때 게롤트가 해 줬던 얘기예요. 으, 그 당시에는 누가 저를 "꼬마"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는데, 이젠 제가 저를 꼬마라고 부르고 있네요. 뭐, 사실이긴 하니까요. 방황하는 외톨이 꼬마였죠. 그때는 에르빌 왕의 병사들과 그 고약한 아들인 크리스틴한테서 도망쳐야 했어요. 정말 정말 결혼하기 싫었거든요. 크리스틴의 숨소리만 떠올려도... 으! 아무튼... 그러다 브로킬론의 숲에서 길을 잃었어요. 게롤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거기서 죽었겠죠. 게롤트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거대한 지네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 맞다, 맞다! 지네가 아니라 이그헤른이었어요. 스콜로펜드로모프라고도 하는 그거요. 근데 판화만 봐도 덩치 큰 지네 같은 건 사실이잖아요. 아무튼 게롤트가 이그헤른한테서 저를 구해준 다음, 저는 우거진 숲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데, 게롤트가 삼촌한테 들은 거라면서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인간들한테 쫓기는 고양이와 여우 이야기 말이에요. 따지고 보면, 삼촌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삼촌이 저한테 첫 번째 가르침을 준 셈이라고 볼 수도 있죠. 꽤 마음에 들었어요. 도망칠 때는 여우처럼 똑똑하게 구는 것보다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게 나은 거 같더라고요. 사냥꾼을 속이려고 이것저것 재지 말고, 빠르게 결정한 뒤에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거죠. 간단하잖아요. 나무에 오르고, 도망가고, 뒤돌아보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러지 않았다가는 장식용 모피로 생을 마감하게 되겠죠. 이 붉은 토시처럼요.
누굴 위해 건배할까요? 게롤트? 건배!
후아, 이거 세네요. 브로킬론의 물만큼이나 세요.
있잖아요, 베스미어 삼촌... 진짜 오래전이지만, 저는 그때도 제가 게롤트의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게롤트가 고양이와 여우 이야기를 해 줄 때 확실히 느꼈죠. 우리를 묶어 놓은 힘이 혈연보다 강하다는 걸요. 그런데 그 당시의 게롤트는 너무 고집이 세서 이런 걸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황야에 버려진 아이보다도 멍청했다고요, 아시겠어요? 암요, 아시겠죠. 삼촌이 게롤트한테 멍청하다고 하는 것도 다 들었거든요. 맞는 말이에요, 삼촌.
다시 첫 번째 가르침 얘기로 돌아갈까요? 고양이와 여우 이야기요.
삼촌도 한때는 침대맡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죠. 저는 한밤중에 잠에서 깰 때면, 악몽 때문에 다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곤 했어요.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죠... 그러다 갑자기 삼촌 목소리가 들렸어요. 따뜻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 말이에요. 그러면 두려움이란 게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곤 했죠. 그런데 삼촌이 들려주는 얘기는 게롤트가 들려주는 얘기와는 좀 달랐어요. 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시는데도, 하나도 안 지루했죠.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어요.
죄송한 얘기지만, 그 가르침 때문에 결국 스승님을 속이게 됐죠. 네, 들으신 게 맞아요. 삼촌을 속였다고요. 저는 살짝... 아니, 좀 많이 다루기 힘든 아이였어요. 하지만 삼촌은 그런 저도 예뻐하셨죠. 그래도 저 때문에 속 좀 썩이셨을 거예요. 많이는 아니더라도요.
브로킬론의 괴물들은 이미 흐릿한 기억이 되고, 못생긴 크리스틴 왕자는 아예 기억도 나지 않게 됐을 때쯤이었어요. 신트라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시점이었죠. 위쳐들의 요새는 저의 집이 됐고, 삼촌과 늑대 교단원들은 제 가족이 돼 주었어요.
네, 맞아요. 삼촌도 잘 알고 계시죠. 죄송해요, 얘기를 너무 질질 끌었네요.
그래서, 음... 혹시 제가 요새에서 빠져나갔을 때 기억나시나요? 네, 한두 번도 아니었죠. 그때쯤엔 거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네, 별거 없었죠. 침대 하나에 옷장 하나, 그리고 제가 죽이고 기념품으로 간직한 더러운 쥐 한 마리뿐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거기보다 아늑한 곳은 없었어요. 신트라에 있던 제 방보다 편안한 곳은 아니었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무조건 케어 모헨을 고를 거예요.
그럼 왜 빠져나갔는지 궁금하시겠죠?
그건 조금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일단 술이나 더 받으세요.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베스미어 삼촌. 솔직히 케어 모헨을 처음 봤을 땐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 죽도록 무서웠죠.
신트라가 멸망한 뒤에 게롤트를 만났고, 게롤트가 저를 거둬들였어요. 당시에 저는 세상에 더는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끔찍한 건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던 참에... 집은커녕 폐허가 된 어두운 성에서 쥐 떼와 악몽 같은 메아리와 지내게 된 거예요. 무시무시한 검은 형상을 봤어요.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저를 바라보는 악마도 있었죠. 그러다 삼촌의 따뜻하고 편안한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그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검은 형상들은 친구가 되어 저를 보호해 줬죠. 눈을 반짝이며 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더라고요.
정말 모두가 저를 돌봐 줬어요. 너무 잘 챙겨줬죠.
그런데 몇 가지는... 삼촌만이 도와줄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삼촌이 저를 위해 만들어 준 가죽 재킷 같은 거요. 조금 비뚤어지긴 했지만... 아니, 많이 비뚤어져 있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자존심 강한 재단사가 만든 악몽 같은 옷이었어요. 그래도 전 좋았어요. 삼촌이 저를 위해 벼려준 검만큼이나요. 교단의 어느 누구도 제 훈련 일정을 까먹질 않았어요. 정말 단 한 명도, 단 한 번도 까먹질 않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재능이 있는 아이일지라도, 제 몸에 맞는 제대로 된 옷과 검이 필요하다는 걸 기억해 준 사람은 삼촌뿐이었어요. 삼촌은 정말 최선을 다하셨어요.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서 그랬을까요?
삼촌한테 보답하려는 마음이 약했으면, 요새를 빠져나가지도 않았을 거예요. 숲으로 뛰어가는 대신 훈련을 받았을 테고요. 당시에 전 제가 사라졌다는 걸 누가 눈치채기 전에 요새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삼촌이 맨날 사슴고기 좀 먹고 싶다고 얘기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가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꼬마 위쳐들이 우리 대신 사냥을 다녀올 수 있게 되면, 사냥감으로 파티를 하자."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죠... 맨날 콩만 먹었어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콩이었죠.
뭐, 그때 전 어렸어요. 위쳐... 비스무리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라면 삼촌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 거라는 멋진 생각을 했어요. 물론 걱정이 하나 있었죠... 삼촌한테 얘기해도, 삼촌이 허무맹랑한 얘기 정도로만 치부할 것 같았거든요. 운이 나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온종일 검이나 손질하게 될지도 모르는 거였고요. 다 저를 아끼시니까 그러셨겠죠. 저랑 제 검을 아끼셨으니까요.
그래서 삼촌한테 말하지 않고, 놀라게 해드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먹음직한 멧돼지 한 마리로 말이죠.
저는 그런 멧돼지가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아뇨, 전혀요.
준비도 없이 멧돼지를 잡으러 간 건 아니었어요. 덫을 만들었죠... 네, 인정할게요. 탈가르 윈터도 아니었고, 울프 핏도 아니었어요. 그냥 간단한 함정이었죠.
근데 성공했어요!
네, 거의 성공했었죠. 탁! 하더니 착! 하면서요. 그런데 멧돼지가 계속 움직이더라고요. 그러더니... 그 덩치 큰 짐승이 돌진하기 시작했어요.
저를 향해서 말이에요.
그래도 저는 도망가지 않았어요, 베스미어 삼촌. 삼촌이 제 손에 딱 맞게 만들어 준 검을 들어 올리면서, 어떻게든 삼촌이 훈련 중에 가르쳐 주신 것들을 떠올렸죠. 달려들고, 공격하고, 빠지고! 반 피루엣, 세게 치고, 뒤로! 한쪽 팔로는 중심을 잡고 다른 팔로는 멧돼지를 베며, 떨어진 나뭇잎 밑에서 뻗어 나온 뿌리로 가득한 미끄러운 숲을 뛰어다녔죠.
멧돼지는 제 피루엣을 완전히 무시했어요. 정말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요. 털이 수북한 등에 적어도 한 번은 칼을 찔러 넣었는데, 아프다는 소리도 안 내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머리를 들고 땅을 박찬 다음, 방향을 돌려 다시 저한테 돌진했어요.
저는 두 발로 자세를 잡고 싸우려고 마음먹었어요. 삼촌이 보셨으면 자랑스러워하셨을걸요.
공격하고, 움직이고! 응수! 반 피루엣! 응수하고, 피루엣! 반 피루엣! 뛰어서 베고!
그런데 이 돼지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라고요.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저를 노려봤죠. 제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제 공격은 효과가 없어 보였어요. 아무 의미도 없었죠. 수수 더미나 통나무를 찌르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포기는 없었죠! 저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자세를 잡았어요. 삼촌이 알려 주셨잖아요. 집중하고 있다가 공격이 날아오는 마지막 순간에 피하라고요.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피루엣!
그런데 하필 그 피루엣을 제대로 돌지 못했어요.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망해 버렸죠. 녀석이 제 옆구리를 쳤고, 저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날아갔어요. 떨어지면서 나무에 등을 박았고, 검을 놓쳐 버렸죠. 순간 제 눈앞에 브로킬론이 보이더라고요. 별도 좀 보였고요. 머리가 울렸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러고 나니까 딱 한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망치자! 삼촌의 이야기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한다고 말이죠.
멧돼지는 여유로워 보였어요. 처음엔 땅에 떨어진 검의 냄새를 맡더라고요. 그러고는 저를 향해 거대한 머리를 서서히 들어 올렸죠. 나뭇가지 사이에 뒤엉킨 소녀를 향해서 말이에요. 제 갈비뼈는 불타는 듯이 아팠고, 그냥 숨만 쉬어도 온몸에 고통이 느껴졌어요.
그 고집 센 멧돼지는 보초라도 서는 것처럼 나무 아래서 태연하게 기다리고 있었죠.
녀석이 지루함을 느낄 때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없어졌다는 걸 삼촌이 알아차리시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죠.
우리 저녁 식사가 될 뻔했던 멧돼지가 사라지길 기다리면서, 저는 동요의 가사를 떠올렸어요. 삼촌이 해 주신 노래 말이에요.
"어쩜 이렇게 작은 멧돼지가
반짝이는 어금니로,
숲길에 자국을 남기고,
거친 나무껍질을 긁어놓는지!
어쩜 저렇게 미소 지으며
발톱을 가지런히 펴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입속으로,
어린 아가씨들을 환영하는지!"
삼촌 덕분에 알게 된 게 많은데, 그중에 캐럴레이스의 루이스의 시도 있었어요. 뭐, 그 상황에서 별 도움은 안 됐지만요.
사실 좀 짜증 났어요.
커다란 떡갈나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데, 삼촌의 목소리와 가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거든요.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죠. 멧돼지 발굽에 밟혀 진흙투성이가 된 검을 보니 집중이 안 되더라고요. 좌절감이 몰려왔죠. 자기 검이 그런 꼴이 되다니...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멧돼지가 사라졌다고 확신했을 때, 머릿속에는 온통 무기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저는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어요.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아팠지만, 제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죠.
그때,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뇨, 머릿속에서 말고 진짜로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죠. 삼촌이 제 이름을 부르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어요. 저는 재빨리 덤불 속으로 손을 뻗어 검을 잡았어요. 그 진흙탕 속에서도 칼날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죠. 그리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나무들 사이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고, 그 어둠 속에서도 삼촌의 외침은 커져만 갔죠. "시리! 시릴라!"
시릴라 피오나 엘렌 리안논. 신트라의 공주...
그 순간, 악몽이 되살아났어요. 분명히 깨어 있었는데도 말이죠. 제 앞엔 불의 장벽이 펼쳐져 있었어요. 그리고 날개 달린 투구를 쓴 무서운 흑기사가 보였죠.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는 신트라 사람들의 비명도 들렸어요.
이번엔 나무 위로 "올라가지" 않았어요.
저도 모르게 갑자기 어느 소나무 꼭대기에 있었죠. 그리고 바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또 그러는 거예요. 또 소나무 꼭대기에 있더라고요. 이번엔 돌덩이처럼 곤두박질치기 전에 나뭇가지를 잡았어요. 기적적으로, 그 순간에도 어떻게든 검을 움켜쥐고 있었죠. 그리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삼촌이 제 발자국을 따라 큰 떡갈나무로 오는 걸 지켜봤어요. 삼촌은 머리를 긁적이고 계셨죠. 제 발자국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제가 처음으로 순간이동을 했던 게 아마 그때였던 것 같아요.
여태 왜 얘기 안 했냐고요? 음, 게롤트가 도와줬거든요. 삼촌이 저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작 저를 찾은 건 게롤트였어요. 항상 그랬죠. 운명이란 게 그렇잖아요?
알아요, 알아. 지겨워 죽겠죠. 결론은 맨날 운명 얘기로 끝나니까요.
참, 콩 요리도 맨날 먹었죠, 하!
어쨌든, 그때 영문도 모르고 나무 꼭대기에서 삼촌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시간도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았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삼촌도 저한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환영은 보였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여우들과 함께 도망가고 있었어요. 고양이는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녔죠. 그 뒤로 사냥꾼들이 따라오고 있었어요. 검은색과 붉은색 옷을 입고, 사냥개들이랑 무시무시한 사자까지 끌고서요.
결과는 뻔했죠. 여우들은 피투성이 모피가 돼 버렸고, 고양이는 멀리 달아났어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달려가던 그 순간에...
제 눈이 떠졌어요.
게롤트가 굳은 얼굴로 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입가의 옅은 미소를 완전히 숨길 순 없었죠. 저한테 화가 났지만, 중요한 건 제가 무사하다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저는 빠르게 조잘대기 시작했어요. 트레일을 떠났던 얘기, 엄청난 계획을 세웠던 얘기, 함정을 설치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얘기, 그리고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 센 멧돼지 얘기까지도요. 순간이동이나 환영 얘기만 빼고 다 말했죠. 너무 무서워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원래 계획 얘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게롤트와 함께라면... 멧돼지 따윈 상대도 안 될 거야!'
그런데 게롤트는 반대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우연히 숲을 보살피는 정령인 올드 와일드를 만난 거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멧돼지가 아니란 거였어요. 근데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그래서 케어 모헨으로 돌아가는 길에 토끼를 한 마리 잡았어요. 조그맣고 비쩍 말라서 힘줄이 다 드러나 있었지만, 수프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어요. 기억나세요? 하긴, 기억하실 리가 없죠... 저희가 돌아왔을 때 토끼를 잡아 온 것도 모르셨잖아요. 삼촌은 피로나 배고픔 따위엔 관심이 없으셨어요. 그보다는 제 목소리에 담겨 있는 두려움과 가슴팍에 남은 멍 자국에 신경 쓰셨죠. 삼촌은 곧바로 제 상처를 치료하고, 치료용 물약을 만들기 시작하셨어요.
삼촌은 토끼 수프에 손도 대지 않으셨어요. 단 한 숟가락도요. 그 대신 얼른 기운 차리라면서 저한테 다 먹이셨죠.
동화도 들려주고, 노래 가사도 알려 주셨죠. 그 많은 걸 다 읽어 주셨어요. 펜싱도 가르쳐 주셨고... 더 말하라고요? 흠... 삼촌이 가르쳐 주지 않은 걸 얘기해 볼까요?
그럼요, 많았죠. 근데 이건 꽤 중요한 거예요.
보기와 다르게, 삼촌은 게롤트와 마찬가지로 남을 죽이는 법을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자신을 방어하는 법이나 살아남는 방법,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가르쳐 주셨지만... 냉정하게 남을 죽이는 법은 알려 주지 않으셨죠.
싸우는 방법과 죽이는 방법은 다르니까요. 삼촌은 그 점을 잘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칼을 휘두르는 법과 피루엣을 알려 주셨죠. 피하는 법과 막는 법도 알려 주셨고요. 아, 공격하는 법도 알려 주긴 하셨네요! 가죽 가방을 자르는 법, 밀짚 허수아비와 덩치 큰 쥐를 죽이는 법 같은 거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법은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그건 저 혼자 터득했어요. 시간이 좀 흐른 다음에요.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인 건, 케어모헨을 떠난 지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어요. 멜리텔레의 사원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예니퍼의 감시 아래 마법을 수련하던 때였죠.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조금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저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타네드 섬이었죠.
쿠데타 중이었던 섬 말이에요.
근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할 생각은 없어요. 삼촌도 이미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래도 끔찍하긴 했어요. 침대에서 자고 있다가, 갑자기 시체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타네드는 갑자기 두 번째 신트라가 돼 버렸어요. 사람들은 제 눈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처절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잔인하게 죽어갔죠. 칼에 맞아 죽든 마법에 죽든, 죽음이라는 걸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도망쳤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사라졌으니까요. 제가 또 추격당하게 놔두고 말이에요. 그 혼란 속에서 저는 미친 듯이 달렸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토르 라라의 포탈 앞이더라고요. 포탈은 유혹하듯이 저를 끌어들이며 속삭였어요... 어차피 그 빛나는 포탈 말고는 도망갈 방법도 없긴 했죠. 그래서 전 눈을 감고 한 걸음 내디뎠어요. 그러자 눈부시게 밝은 빛이 비치며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죠.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폐에서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결국 저는 또다시 혼자가 됐어요.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말이죠. 워프 포탈은 저를 무슨 사막에다 데려다 놨어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말이죠. 하지만 저는 살아남았어요. 방법을 찾았거든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는 건 잘 아시죠? 근데 그때는 참 운도 없게 도적단 무리와 정면으로 마주쳤어요...
제가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항상 문제가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어요. 다시 이렇게 붙잡힐 운명이라고만 생각했죠. 뭐, 이젠 삼촌도 아시겠지만, 운명이란 놈을 이길 순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잡히지 않았어요. 여우들한테 배운 교훈 덕분에 간신히 도망쳤죠.
저는 항상 궁금했어요. 여우들은 언제 모습을 드러낼까, 여우들은 누굴 말하는 걸까, 여우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근데 알고 보니 꽤나 거친 한자 동맹이었죠.
네, 삼촌. 부끄러운 과거를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 자신조차 용서하지 못할 짓들을 저질렀죠. 별 볼 일 없는 도적 무리에 합류했거든요.
랫츠였죠.
제가 어떻게 한자 동맹에 가입했을까요? 저를 붙잡은 용병들이 다른 갱단과 만찬을 즐기는 사이에 랫츠가 여관을 습격했어요. 다른 갱단이 놈들의 동료를 붙잡아 두고 있었거든요. 제 바로 옆에 묶여 있었죠.
뭐,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 랫츠랑 붙는 게 그나마 낫겠더라고요. 그래서 랫츠를 도왔어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요.
그래서 또 싸움이 벌어졌어요. 타네드에서 있었던 싸움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요. 그렇게 저는 랫츠와 함께 다시 도망치게 됐어요.
그리고... 그때였어요...
저는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빌어먹을 여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고 있었죠.
절대 잡히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갑자기 돼지우리에서 마을 사람이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창으로 저를 공격했죠.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 일은 오랫동안 꿈에서 저를 괴롭혔어요. 아직도 생생해요. 동작 하나하나까지도요. 저는 본능적으로 창날을 피해 반 바퀴 돌았고, 마을 사람은 제 반격을 피할 겨를이 없었어요. 제 공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빨리 끝났죠.
아주 잠깐이지만, 그 남자가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려 하는 걸 봤어요. 햇볕을 가리려고 모자를 써서 그런지 길쭉한 대머리 위쪽이 창백해 보였는데, 이내 빨갛게 변하더라고요. 남자는 울부짖으며 숨을 헐떡였고, 짚 다발과 똥 무더기 속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죠. 그러고는 칼에 찔린 돼지처럼 피를 뿜어 댔고, 저는 속이 뒤틀려서 저절로 토가 나왔어요.
저는 방금 벌어진 일을 정당화하려 했어요. 저 자신한테 훈련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되뇌었죠. 의도적인 게 아니라, 몸이 그냥 움직인 거라고요. 사람을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고, 자기방어였을 뿐이라고 말했어요.
그건 사실이었으니까요... 적어도 첫 번째 살인은요.
이후에, 저는 공식적으로 랫츠에 합류했고 변해 버렸죠. 저는 변했어요. 죽일 만한 이유도 아닌데 사람을 죽이고 다녔죠. 물론, 제 목숨을 걸 가치도 없는 일이었고요.
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된 건 아니었어요.
오랫동안 떠돌았으니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진짜 살인자처럼 행동했어요. 이후에도 몇 번이나 전투가 벌어졌는데, 저는 무자비하게 적을 공격했어요. 정말 위험한 공격처럼 보이게요. 하지만 사실 적을 제압하려는 마음뿐이었죠. 죽이지 않아도 제압하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집행관 호송 사건 때도 그랬죠...
저희는 무너진 다리 근처에서 호송대를 만났어요. 랫츠는 한 명만 빼고 호송대를 전부 죽여 버렸죠. 살아남은 병사는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저를 보고는... 말을 돌려 저한테 돌진했죠. 병사는 반격을 예상하고 제 공격을 막았지만, 저는 공격에 성공했어요. 입을 제대로 찔렀죠.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꽤 아팠을 거예요. 제 얼굴을 망가뜨린 상처처럼요...
그 남자도 살아남아서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삼촌도 아시겠지만, 저한테 덤비는 사람이 많았어요. 저는 랫츠에서 제일 어렸으니까요. 아니면 제일 약해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 이유야 어찌 됐든, 죽음은 항상 제 주변에 있었어요. 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한발 앞서 저를 둘러싸고 있었죠. 덕분에 제 손은 항상 죽음으로 물들어 있었어요.
케어 모헨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특히 밤이 되면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하지만 두려웠어요. 타네드에서 너무 많은 걸 잃었으니까요. 아니면 그냥 그렇게 믿었던 거일 수도 있겠죠. 제가 너무 무력해 보였거든요.
얼마 남지 않은 것들까지 잃고 싶진 않았어요. 혼자가 되긴 싫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삼촌이 계속 케어 모헨에 계셨으면 했어요. 요새로 돌아가면 삼촌이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 주실 거라고 상상하고 했거든요. 그렇게 되길 바라며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곤 했죠. 하지만 아시잖아요. 전시에 혼자 길을 나섰다간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요.
저는 죽기 싫었어요. 그래서 그 파란만장한 갱단에 더욱 의지했죠. 진짜 쥐라도 되는 것처럼 갱단 속에 숨었어요. 그냥...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죠.
저희가 뉴 포지의 마을을 습격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저희가 잠입한 목적은 하나였어요. 시장의 집에 불을 질러서,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는 거였죠. 저희 동료를 용병에게 넘긴 게 바로 그 시장이었거든요. 네, 술집에 있던 그 동료요. 우리한테 그런 짓을 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보여 줘야 했어요. 무슨 대가였냐고요...? 당연히 목숨이죠.
하지만 이건 알아 두셔야 돼요, 삼촌. 그게 꼭 악행은 아니었어요. 랫츠의 평판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거든요.. 저희는 무시당하고 살았지만, 대부분의 전리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닐프가드인들이 사는 마을에 소와 곡물, 옷 등을 나눠주고 다녔죠. 사람들을 도왔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재단사와 장인에게 금과 은을 두둑하게 얹어 주며 저희에게 필요한 무기와 옷, 장식품을 만들어 달라고 했죠. 저희의 관대함에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대접해 줬어요. 잘 곳을 제공해 주고, 저희를 숨겨 주기도 했죠. 심지어 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까지도 저희 은신처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요. 정말 의리 있는 사람들이었죠.
결국, 시장이 저희한테 꽤 큰 현상금을 걸었어요.
그러자 돈에 눈먼 사람들이 닐프가드인들에게 보상을 받겠다고 나섰어요. 돈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팔아넘기고 자신의 마을까지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뉴 포지의 시장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죠.
근데 그날 밤... 화염과 혼돈 속에서 발생한 일은... 저를 현실로 되돌려 놓기에 충분했어요.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줬죠. 덕분에 최대한 빨리 랫츠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가능하다면 말이죠.
돈을 나눠 줄 때의 저희는 진짜 시끌벅적하게 움직였어요. 무슨 행사라도 열린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공격할 때는 쥐처럼... 아니, 여우처럼 행동했죠. 조용하고, 은밀하고, 교활하게요.
그날 밤, 타오르는 불꽃 소리가 적막을 깼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시끄러워졌죠. 화염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 울부짖음이 들렸어요. 저희 말은 그런 소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소란 속에서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어요. 첫 번째 생존자가 연기 나는 오두막에서 뛰쳐나왔어요. 옷을 보니 노예 같았죠. 저희도 칼집에서 검을 꺼냈어요. 불타서 죽지 않았다면 저희 손으로 끝내야 했으니까요.
그때 갑자기 집 뒤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숨겨진 마구간에서 기수들이 달려 나왔어요. 그중에는 바지만 입고 있는 시장도 있었죠. 시장이 말을 타고 가는데 뚱뚱한 뱃살이 흔들리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희는 노예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시장과 그 친족을 추격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수가 엄청 많더라고요. 아마 온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았죠. 외가 쪽 5촌 조카까지 있었으니 말 다 했죠. 거기 있었던 랫츠보다 수가 많았으니까요.
전 두 명을 상대했어요.
한 명은 덩치 큰 말을 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가냘픈 암망아지를 타고 있었어요. 덩치 큰 말을 탄 쪽은 안장 위에 똑바로 앉아 있었지만, 작은 망아지를 탄 쪽은 말 위에서 버티는 것도 힘들어 보였죠. 저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그 둘을 따라 말을 몰았어요. 놈들의 후드가 바람에 뒤로 젖혀지는 순간, 저는 놈들 바로 뒤까지 추격해 들어갔어요. 놈들은 화염에 붉게 물든 머리칼 사이로 저를 봤죠. 그때, 화염에서 독한 연기가 날아와 숨이 막혔어요. 눈물을 쏟을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죠. 눈물을 닦고 다시 앞을 봤는데...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어요. 불빛 때문에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죠. 왜냐하면... 덩치 큰 말을 탄 사람이... 삼촌처럼 보였거든요. 그리고 작은 암망아지를 탄 쪽은 제 또래 같았어요. 사실 꼬마였죠.
전 둘을 가로막고, 검을 휘둘렀어요.
그러자 나이 든 남자가 응수했죠. 삼촌처럼 보이긴 했지만, 검술 실력은 삼촌보다 한참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어요. 저는 그자를 안장에서 밀치고, 땅으로 던졌어요. 그리고 본능적으로 물어봤죠. 누구냐고요. 중요하지도 않은 건데 말이에요. 남자는 그물에 걸린 수리부엉이처럼 몸부림치며 꼬마에게 소리쳤어요. 하지만 꼬마는 도망가라는 말을 듣고도, 어설픈 자세로 말에서 내려 남자에게 다가왔죠. 자신의 보호자를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거예요.
그 순간 느꼈어요.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죠. 삼촌이랑 저처럼 말이에요.
그 꼬마는 시장의 아이였을 거예요. 통통한 얼굴이 똑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모습... 표정... 그걸 보고 있으려니... 제가 생각나더라고요.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제 모습이요. 그 어린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더라고요. 얼마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죠. 왜냐하면 그날 밤 제 얼굴은 달랐거든요. 사냥꾼의 얼굴이었죠. 예전에 저를 추격했던 사람들처럼요.
이젠 제가 추적자였어요. 사람을 해치고, 훔치고, 죽이는...
손가락에 힘이 풀리면서 검을 떨어뜨렸어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이렇게 말했죠. "얼른 가... 달려. 꺼지라고!"
나이 든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것인지 따위는 궁금해하지도 않았죠. 남자는 꼬마의 손을 잡고 바로 안장에 앉혔어요. 그리고 자기도 말에 올라탄 뒤에 그대로 말을 몰아 그곳을 떠났죠.
저는 그 둘이 멀어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어요.
제 뒤에서는 꼬마의 가족들이 고문을 당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죠.
그래서 전 떠나기로 했어요.
다음 날 밤, 전 얼마 있지도 않은 물건들을 챙겨서 캠프를 몰래 빠져나왔어요. 길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죠. 케어 모헨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삼촌이나 게롤트, 예니퍼를 찾아서요...
그런데 랫츠의 리더, 지젤허가 제 앞을 막아섰어요.
지젤허는 제가 한 짓을 알고 있다고 했어요. 꼬마를 도망치게 놔둔 거 말이에요. 지젤허가 얘기하진 않았지만, 저는 그 아이의 스승을... 죽였어야 했어요. 어른은 살려두면 안 되거든요. 그 사람들은 계속 랫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 거고, 언젠가 제 뒤통수를 치러 올 테니까요. 그래서 처벌이 아주 가혹해야 했어요. 배신자는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죠. 그게 규칙이었어요. 그래서 제 앞에 선 지젤허는 검을 들어 올렸죠.
하지만 저는 배신자가 아니었어요. 적어도 그 당시에는요.
지젤허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어요. 캠프로 돌아갈 건지 배신할 건지,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묻는 마당에... 고민할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물러서지 않으면, 지젤허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게 랫츠의 방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죽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저도 검을 들어 올렸을 거예요. 결투를 벌였겠죠. 하지만 지젤허가 질 게 뻔했어요, 삼촌. 제가 실력이 훨씬 좋았으니까요. 그때는 마법도 쓸 수 없었어요. 마법을 썼다가는 능력을 영원히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젤허의 뒤로 가볍게 뛰어올라,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도 없었다는 얘기예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랫츠를 죽이거나... 랫츠와 함께하거나.
근데 삼촌... 지젤허는 저한테 항상 친절하게 대해 줬어요. 저를 다치게 하거나, 저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죠. 오히려 자기 전리품을 나눠 주고, 저희를 응원해 줬어요. 저처럼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챙겨 줬다고요. 지젤허는 그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지만, 저희는 건드리지 않았어요... 자신의 랫츠였으니까요.
전 검을 들어 올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억지로 웃는 척했죠. 그리고 지젤허에게 뭐 그렇게 똥폼을 잡고 있냐고 물었어요. 여자는 밤중에 산책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냐고 말이에요.
지젤허는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제가 대충 꺼내 본 산책에 자기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기회를 봐서 그 남자를 죽이겠다고 얘기하려 했어요. 근데 그 후로 지젤허는 아이와 스승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다행히, 랫츠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 얘기를 꺼낼 기회는 없었어요.
몇 주가 흐르고, 몇 달이 지났어요. 저희는 계속 약탈을 하고 피를 흩뿌렸죠. 그리고 마침내 제가 랫츠를 떠나게 되는 날이 왔어요...
그날 랫츠의 모든 멤버가 살해당했어요, 삼촌. 아예 갱단 자체가 사라졌죠. 제가 살인을 하지 않으려 해도, 죽음은 언제나 제가 가는 길을 따라다녔어요.
랫츠는 제 환영에 나오던 사자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했어요. 바로 현상금 사냥꾼, 레오 본하트였죠. 남을 깔보는 듯한 눈빛으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살인 청부업자였어요. 평생 만나 본 사람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죠. 레오 본하트는 랫츠의 작은 여우들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챙겼어요.
그리고 저는...
조금 쉬어야겠네요, 삼촌. 한 잔 더 드실래요?
정말 마지막 잔이에요.
제가 죽였어요, 삼촌... 네, 본하트를요.
그렇게,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고통과 상실감, 모욕을 버텼죠. 그리고 아주 멀리 도망쳤어요. 다른 세계와 다른 시대까지 다녀왔죠. 그런 삶이 영원히 계속될 거 같았어요. 죽음은 항상 저를 둘러싼 채 제 곁을 맴돌고 있었죠. 하지만 평생 운명을 피해 도망 다닐 수는 없었어요.
그 개자식과의 싸움은... 꽤 거칠었어요, 삼촌. 제가 그놈과 싸우는 모습을 보셨다면, 저를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예요.
근데 그 얘긴 나중에 하도록 할게요.
불이 꺼져 가네요. 제 잔은 비었고, 삼촌 잔은... 아직 꽤 남았네요. 그럼 삼촌이 주신 마지막 교훈 얘기를 해 볼까요.
결국 언제까지나 도망갈 순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대해도, 언젠간 맞설 수밖에 없는 거죠.
할머니랑 게롤트, 예니퍼... 그리고 삼촌. 다들 저한테 도망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도망쳤고요. 신트라와 브로킬론에서 도망쳤고, 타네드를 거쳐 티르 나 리아까지 갔어요. 사냥꾼과 암살자, 엘프와 인간, 검은 옷과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쳤죠.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다른 세계로 도망친 적도 있어요. 저만 떠나면 다들 안전해질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삼촌은 여전히 저를 찾아다니셨죠. 절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게 사랑이겠죠. 사랑한다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삼촌은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을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셨잖아요.
하지만 그건 제 싸움이기도 했어요, 삼촌. 삼촌만의 싸움이 아니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순간에, 저를 지탱해 준 건 삼촌이 남겨 주신 따뜻한 기억이었어요. 하지만 이 세계는 너무나 어두웠죠. 언제까지나 저를 보호해 주실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요. 악은 항상 삼촌을 따라다닐 테고, 결국 삼촌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언젠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죽음과 맞서 싸워야 해요.
저는 그걸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러기까지 너무 많은 피를 흘렸죠. 삼촌의 피도 포함해서요. 결국 삼촌을 잃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죠.
1년 전 그때,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요.
제가 아직 버려진 성에 들끓는 쥐와 으스스한 메아리를 무서워하던 꼬마 위쳐였을 때, 삼촌은 영원히 살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곧 무덤 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될 거라고 하셨죠.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진 않았어요. 당연하잖아요.
삼촌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잊을 리가 없죠.
모두에게 정말 많은 걸 알려주셨잖아요.
그래서 삼촌의 기일에 여길 찾아온 거예요. 삼촌이 사랑하던 요새의 잔해만 남은 이곳에서, 꺼져 가는 모닥불 옆에 앉아 삼촌을 기리기 위해서요.
육신이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저희에게 전해 주신 지혜와 사랑을 통해 삼촌의 영혼은 저희와 함께할 거예요...
언제까지나...
이젠 안녕이네요, 베스미어 삼촌. 케어 모헨의 마지막 마스터이자...
내 스승님.
편히 쉬세요, 삼촌...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